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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h Piaf - Non, je ne regrette rien(후회하지않아) 1961. 에디뜨 삐아프(샹송)

동천 푸른솔 2010. 4. 2. 01:58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Ni le bien qu'on m'a fait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

 

아니예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간에
그건 모두 나완 상관없어요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rien
C'est paye, balaye, oublie
Je me fous du passe

아니예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건 대가를 치뤘고, 쓸어 버렸고, 잊혀졌어요
난 과거에 신경쓰지 않아요

Avec mes souvenirs
J'ai allume le feu
Mes chagrins, mes plaisirs
Je n'ai plus besoin d'eux

나의 추억들로 난 불을 밝혔었죠
나의 슬픔들
나의 기쁨들 이젠 더이상
그것들이 필요치 않아요

 

Balayes les amours
Et tous leurs tremolos
Balayes pour toujours
Je repars a zero

사랑들을 쓸어 버렸고
그 사랑들의 모든 전율도 쓸어 버렸어요
영원히 쓸어 버렸어요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거예요..

Non, Rien de rien
Non, Je ne regrette nen
Ni le bien, qu'on m'a fait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

아니예요! 그 무엇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간에
그건 모두 나완 상관없어요

 

에디뜨 삐아쁘(Edith Piaf)

 

1915년 12월 19일에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에디뜨 죠반나 가시옹(Edith Giovanna Gassion)

태어나기 전부터 불행은 예고되었다. 아버지는 무능력한 곡예사, 엄마는 3류 가수.

그나마 태어난 지 두달 만에 엄마는 갓난 아이를 놔두고 다른 남자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그녀를 처가에 맡기고 사라졌다.

 

어려서부터 안락과 평화라고는 모르고 성장한 그녀는 가수로 성공하기 전까지 온갖 가시밭길을 걸었다.

 

'루이 르프레' 라는 카바레 주인이 거리에서 노래 부르며 잔돈푼을 벌던 그녀를 무대에 서게 해주고

참새(The Little Sparrow)라는 뜻의 '삐아프(Piaf)'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체구가 작아서 붙여준 ‘삐아프’ 라는 별명이 전세계 샹송 팬들을 사로잡았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고뇌에 가득 찬 그녀의 목소리는 삶의 고뇌를 겪은 그녀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리라.

 

그녀는 평생을 노래와 사랑을 위해 살았다.

샹송을 전세계에 알린 그녀에게는 샹송의 여왕, 샹송의 여황제란 수식어가 붙어 따라다녔다.

한때 ‘프랑크 시나트라’, ‘빙 크로스비’에 이어 세번째로 돈많이 버는 가수로 꼽혔지만, 그녀의 일생은 한편의 영화 스토리처럼 불행했다.

폭발적으로 인기가 오를 때 만난, 막노동하며 살아가는 ‘이브 몽땅’을 가수로 나서게 해주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해서 성공시키면서

 '그가 나를 안고 속삭일 때는 세상이 온통 장미빛으로 보이지요' 라고 '라비앙로즈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을 선물하였건만

그는 떠났다.

그 후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을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한다.

 

한사람은 인기가수로 순회공연을 많이 해야 하고 한사람은 권투선수로 여기저기 원정경기가 많다 보니 함께 하는 시간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은 사랑을 했다. "에디뜨 삐아프'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너무 외롭고, 너무 보고 싶어. 그러니까 배로 오지 말고 비행기 타고와. 배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뉴욕에서 경기를 끝낸 그는 예정했던 배 대신 ‘에디뜨 삐아프’ 말대로 비행기를 탔다.

그 비행기는 추락하고  ‘마르셀 세르당’은 그녀 곁을 떠났다.

 

어처구니 없는 애인의 죽음,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에 그녀는 며칠을 방에서 칩거하다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죽은 애인을 위해 사랑의 찬가(L'Hymne A L'Amour)를 바쳤다.

그 곡은 그 후 'I'm sorry‘로 잘 알려진  ‘Brenda Lee’가 'If You Love Me' 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안해서 불렀다.

그 후 그녀는 ‘뤼시엥 부아’의 남편이었던 가수 ‘쟈크 필스’를 만나 뉴욕에서 결혼했다.

 

그와  4년 만에 이혼하고 46세가 되던 해에 19살 연하인 27세의 그리스 출신 미용사인 청년 ‘테오 사라포’를 만난다.

네 번의 교통사고를 겪고 몸에 병을 안은 채 죽음을 앞두고 시작한 4번째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1962년 그리스정교회에서 결혼한다.

그녀는 '테오 사라포'를 가수로 만든다.

그리고 1963년 10월 11일 남프랑스 요양지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 유해는 파리로 옮겨졌다.

 

그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예술의 천재 ‘쟝 콕토’가 심장마비로 몇 시간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장례식에 전세계에서 40만 인파가 몰렸다.

평생을 불행, 비극, 수많은 스캔들, 알콜 속에서 살아갔다.

그녀의 노래에 나타나는 진실성과 노래를 향한 불굴의 정신을 ‘쟌 다르끄’와 동등한 영웅으로 표현하는 평론가도 있다.

그녀가 죽은 지 46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샹송이 프랑스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에디뜨 삐아프’ 덕이다.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1915-1963) : 프랑스 샹송가수.

10세 때부터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고, 14세에 서커스단 가수로 활동, 20세에 가수로 데뷔하여 평생을 작사 및 가수 활동을 하였다.

'장미빛 인생', '사랑의 찬가' 등을 작사하였고, '노래하여 주게'를 작사, 작곡하였다.

 

출처 com as 요원

'나는 후회하지않아'이 곡은 '에디뜨 삐아프'의 생애 마지막 곡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