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티스트 리뷰 』

★ Elvis Presley(엘비스 프레슬리) ★

동천 푸른솔 2008. 11. 23. 13:27

                             

로큰롤의 제왕이자 로큰롤 시대의 선두 주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찬사와 비평을 한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배 록 가수들에게 하나의 전설로 남아있는 아티스트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Aron Presley)이다.

그의 음악경력의 시작은 8세가 되던 해 지역 송 콘테스트에서 레드 폴리(Red Foley)의 슬픈 발라드 'Old Shep'를 부르고 5달러를 받았던 것이었다.
어린 시절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고 가스펠 곡을 불렀던 것이 음악생활의 전부였던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트럭 운전사로 일하게 된다.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그 당시 일반인들에게 레코딩 부스 대여 서비스를 했던 선 레코드사(Sun Records)를 찾게 되면서부터 보잘 것 없고 가난한 한 청년은 최고의 수퍼스타로 탈바꿈하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그의 유별나면서도 독특한 보컬 스타일에 흥미를 느낀 스튜디오 매니저 마리온 키스커(Marion Keisker)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사장이자 프로듀서인 샘 필립스(Sam Philips)에게 추천했고, 그의 가능성을 감지한 샘 필립스는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Scotty Moore)와 베이시스트 빌 블랙(Bill Black), 엘비스가 팀을 이루어 연습하도록 했다.
엘비스의 풍부하고 다양한 음색이 돋보이는 'That's All Right(Mama)'와 컨트리송인 'Blue Moon Of Kentucky'가 담긴 첫 데뷔 디스크가 발매된다. 지방 방송국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데 힘입어 두 번째 싱글을 출반한 후 엘비스 프레슬리는 웨스턴 밥의 제왕(the king of western bop), 시골뜨기(The Hillbilly Cat)라는 표제로 알칸사스, 루이지애나, 텍사스에 있는 클럽을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그의 섹시한 무대와 정열적인 춤, 무릎 꿇은 자세로 무대에 몸을 내맡긴 듯한 드라마틱한 움직임은 엄격한 레코드 관계자들이나 도덕성을 강조하는 부모와 교사들로부터 지탄을 받았지만, 자유분방하며 광신적이기까지 한 10대 팬들로부터는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천부적인 재능의 보컬리스트이며 상업적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감지한 메이저 레이블 RCA 레코드사는 선 레코드사에 35,000달러를 지불했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6년 'Heartbreak Hotel'이라는 싱글로 메이저 레이블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발매되자마자 8주 동안 정상의 자리에 머무른 싱글에 힘입어 공영방송에도 출연한 그는 매력적인 무대로 공중파 방송에서도 화려한 데뷔를 시작한다.
차분한 발라드 곡인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로 또 한번 차트 정상을 차지한 후 그는 팝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더블 싱글 'Hound Dog/Don't Be Cruel'을 선보여 11주 동안 US 차트 정상을 누리는 영광과 더불어 UK 차트에서도 스매쉬 히트를 기록한다.

[Love Me Tender]라는 영화로 박스 오피스 기록을 세운 그는 동명의 타이틀 트랙을 5주 연속 US 차트 정상에 등극시켰고, 이후 군에 입대하기 전 2년 반 동안 RCA, 20세기 폭스사(Twentieth Century Fox), 콜로넬(Colonel)이 각각 제작한 영화 [Loving You], [Jailhouse Rock], [King Creole]에 출연했다.
이 영화들은 그의 군 복무기간 동안에 개봉되어 'Wear My Ring Around Your Neck', 'Hard Headed Woman', 'one Night', 'I Got Stung', 'A Fool Such As I', 'A Big Hunk O' Love' 등의 히트 싱글과 더불어 2년 여의 공백기간을 채워주었다.

제대 후 다시 팝계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아 가곡 'O Sole Mio'를 기반으로 한 'It's Now Or Never'라는 싱글을 발표했는데,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초기 시절 정제되지 못했던 거친 목소리가 아닌 감상적인 저음 가수로 새롭게 변신하도록 만들었다.
이어 'Are You Lonesome Tonight?', 'Wooden Heart', 'Surrender' 등의 곡들을 히트시킨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Flaming Star], [Wild In The Country], [Blue Hawaii], [Follow That Dream], [Kissin' Cousins]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사운드 트랙 음반을 발표했다.

60년대 중반 브리티쉬 로큰롤을 정립한 비틀즈의 명성에 의해 한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사그러들었고, 그의 무분별한 영화선정으로 세인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1968년 12월 3일 NBC 특별 프로그램 'The Elvis TV Special'로 10년만에 부활한 로큰롤의 살아있는 화신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된다.
가죽 재킷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나와 50년대 주요 히트곡들을 부르고, 자신의 의식 없던 영화 출연과 현란한 몸동작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진솔한 모습은 심지어 비평가들로부터도 박수 갈채를 받았고, 곧이어 출반된 'If I Can Dream'이라는 싱글곡을 대히트시켰다.

라스베가스 무대를 통해 다시 라이브 가수로 되돌아온 그는 라이브 실황 곡 'The Wonder of You'를 UK 차트 정상에 진입시켰고, 이어 실황공연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한 [That's The Way It Is]를 발매한다.
그러나 혁신적이고 예술가적인 감각이 위축됨에 따라 엘비스 프레슬리는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약물에 의지하게 되었다. 형형색색의 점프 수트와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된 벨트 같은 의상으로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며 라이브 무대에 서곤 했지만, 결국 1977년 8월 16일 공식적 사인은 심장마비(비만과 약물 장기 복용이 사망원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로 화려했던 생을 마감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사망하고 일주일 안에 그의 음반들은 급격한 판매고를 기록했고, 싱글 'Way Down'은 UK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의 사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로큰롤과 대중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하다.
R&B와 컨트리 음악을 조화시켜 백인과 흑인의 음악적 영향력을 완벽하게 소화한 수많은 명반들을 만들어 낸 엘비스 프레슬리는 순수파들에게나 열광적인 리듬의 재즈음악 선봉자들에게나 정신적인 모태와도 같은 존재이다.
흑인음악의 대명사인 R&B를 로큰롤에 접목시켜 새로운 스타일로 재창조한 그의 음악을 차치하고서라도, 50년대 후기부터 60년대 초기의 영화포스터, 초상화, 우표, 기념품, 전문 모창가, 신문의 머릿기사, 테마 식당, 그레이스랜드(Graceland)의 명소 등을 통해서도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듯이 엘비스 프레슬리는 영원한 미국인들의 우상,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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